숙종은 민회빈을 복위시킨 후 넋을 위로하고자 친히 제문을 지어 올린다. 제문에 따르자면 민회빈은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소학"을 깨우친 것으로 나온다. 민회빈의 영특함과 총명함, 이후 청나라에서의 고생, 그리고 친정아버지인 문정공 강석기의 공덕 또한 언급되어 있다. 숙종의 제문 아래에는 사관의 코멘트가 뒤따르는데, 여기선 숙종의 몸이 편치 않음을 말한다. 것도 그런게 민회빈 복위가 일어난 시점이 숙종이 붕어하기 2년전이라 각종 종기와 병으로 고생했으리라 쉬이 여겨진다.
사관의 코멘트 마지막 말처럼 제문의 내용이 간절하고 측은함을 표현하고 있긴하나 과연 이승과 저승 양편에서 유감이 없을것 같진 않다. 민회빈의 원통함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으리라.
사족으로, 숙종과 민회빈의 친척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인현왕후의 외할아버지인 송준길과 민회빈의 아버지인 강석기는 이종사촌 관계이다. 즉 송준길의 어머니와 강석기의 어머니가 자매지간. 민회빈과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6촌 자매간이고, 민회빈은 인현왕후에게 7촌 이모가 된다. 민회빈은 숙종에게도 처이모뻘이라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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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종 62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윤8월 7일(임자) 2번째기사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민회빈(愍懷嬪)을 복위(復位)한 뒤에 아직까지 직접 글을 지어 나의 뜻을 서술하지 못했으니, 서운한 마음을 어떻게 금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임금이 지은 제문(祭文)을 내리고, 묘소(墓所)를 개수(改修)한 뒤에 별도로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아! 영(靈)께서는 훌륭한 집안이 뛰어난 미인으로 일찍이 세자[貳極]의 배필이 되었도다. 생각이 깊고 성실함은 그의 성품이었고, 아름답고 부드러움은 그의 덕(德)이었다. 예(禮)로 스스로를 경계하고 공경으로 스스로를 보존하였도다. 인목 대비전(仁穆大妃殿)으로부터 가장 돌보아 사랑하시는 은혜를 받았으며, 친히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배우고 부지런히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도다. 문득 들으면 곧 외게 되니 총명하고 민첩함이 보기 드문 바였다. 이역(異域)인 청(淸)나라에서 풍상(風霜)을 겪으며 몇 해나 보내셨던가? 학가(鶴駕-세자가 타는 가마)가 겨우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저승으로 멀리 떠나셨도다. 병술년 에 이르러 나라의 운명은 더욱 어려움에 허덕였도다. 모춘(暮春)의 사건은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는데, 구지(九地)에서 원통함을 품은 것이 육기(六紀) 가 꽉 찼도다.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이라면 누군들 슬퍼하며 탄식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도 평소에 마음속으로 몰래 불쌍한 생각이 들어 틈틈이 우연하게도 옛 사람이 남긴 글을 보았는데, 문정(文貞) 의 덕망과 업적은 빛나게 갖추어 기술되었으니, 그의 행장(行狀)을 고찰하면 더욱 그의 현명함을 알겠도다. 크게 탄식하는 마음 일어나 시(詩)로 감회를 적었도다. 기필코 원통함을 펼 수 있다고 여기고 펴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도다. 사단(事端)이 일어난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었던 것 같으나,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의논이 다를 리가 없었도다. 내 마음으로 결단하여 특별히 사륜(絲綸)18954) 을 선포하였도다. 단서(丹書) 에서 깨끗이 씻어버리니, 위호(位號)가 거듭 새로와졌도다. 추복(追復)하는 은전(恩典) 또한 한 집안에 미치게 되니 사무친 원한을 깨끗이 씻어 넉넉히 화기(和氣)를 인도하였다. 가뭄 끝에 내린 비로 여러 번 시들었던 〈초목이〉 되살아나는 은혜를 입었는데, 누가 모른다고 말하겠는가? 어두운 저승에서의 감응(感應)도 속임이 없도다. 저 구묘(舊廟)를 쳐다보니 신도(神道)가 외로운 듯이 여겨졌는데, 이제 이미 올려서 받드니 거의 위안(慰安)이 될 수 있겠도다. 예(禮)로 보아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 왼편에 부장(祔葬)함이 적합할 듯하여 재실(梓室)을 장차 옮기고자 하여 이미 좋은 날을 가리도록 명하였다. 잇따라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70여 년이나 체백(體魄)을 의탁한 곳인데, 둔석(窀穸) 을 놀라게 하여 편치 않게 할까 하는 마음 없지 않았도다. 면례(緬禮) 하려던 계획을 마침내 정지하고 예전대로 개수(改修)하도록 하였으니, 내가 친족에게 돈독히 하려는 생각은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도다. 영(靈)은 신궁(新宮)에다 안치하고 상석(象石)은 산소에다 설치하였도다. 이제부터는 원한이 없겠으나, 돌이켜 생각하면 서글프고 마음이 상하도다. 이제 공사가 완성된 때를 당하여 깨끗한 제물을 올리며 관원을 보내어 대신 진달하게 하였도다. 비록 잘 차리지 못함이 부끄럽기는 하나, 저승과 이승의 간격이 없으니 정성을 헤아리시고 정상(精爽) 께서는 이르시어 흠향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강빈(姜嬪)의 일은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불쌍히 여기는데, 일이 궁궐에서 나왔으므로 자취가 분명하지 않은 데 관계되고, 세상에서 꺼려하는 바가 되었으므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어찌나 다행스럽게도 성사(聖上)께서 스스로 마음 속에 결단하여 위호(位號)를 빨리 회복시켰으니, 그 지극한 원통을 씻게 하고 빠뜨려진 전례를 가다듬은 것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지어 여러 해 동안 옥체(玉體)가 불편하신 가운데 친히 제문을 지어 외로운 혼(魂)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내용이 간절하고 측은하여 감읍(感泣)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참으로 전대(前代)보다 빛이 나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 양편에서 모두 유감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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