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부

민회빈 (소현세자빈 강씨) 복위 절차-조선왕조실록

역사 사랑 2014. 11. 11. 14:30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본 민회빈에 관한 기록들이다."민회"라는 시호가 숙종이 강빈을 복위, 신원하면서 올린 것이라 검색 결과는 숙종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 1-11번까지를 보면은 1718년 4월26일(음력으로 추정)부터 당해 10월6일까지 복위 및 봉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민회빈의 신주를 소현세자와 합칠때 이 둘의 손자인 임창군(두 분의 막내 아들인 경안군의 장남)이 참여했다고 나와있다. 민회빈은 인조에게 사약을 받을 당시 폐서인이 되어 죄인의 신분이었던지라 남편인 소현세자 옆에 묻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두 분은 죽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현재 소현세자의 무덤은 고양시 서삼릉에, 민회빈의 무덤은 광명시 노온사동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합장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형상 문제로 이장이 무산되며, 대신에 민회빈의 묘를 격에 맞게 보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민회빈의 신주를 소현세자 묘 밑에 묻도록 하였다.

1. 肅宗 44년 4월 26일 에서 : 민회빈의 신위를 소현 세자의 묘당으로 옮겨 봉안하는 절차를 예조에서 아뢴다
2. 肅宗 44년 4월 27일 에서 : 민회빈의 신주를 소현 세자의 묘당에 합쳐 봉안할 때 임창군 이혼과 함께 참여하다
3. 肅宗 44년 5월 11일 에서 : 예조에서 민회빈의 제향은 태묘에 의해 하나의 탁상을 같이 사용하게 하다
4. 肅宗 44년 5월 19일 에서 : 민회빈에게 시책을 선포하는 예를 행하다
5. 肅宗 44년 5월 21일 에서 : 민회빈의 신주를 소현 세자의 묘사에 합봉하다
6. 肅宗 44년 5월 22일 에서 : 민회빈을 복위하고 시호를 선포한 일로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다
7. 肅宗 44년 8월 01일 에서 : 민회빈의 묘를 옮길 때에 의정부와 육조에서만 진향하게 하다
8. 肅宗 44년 윤8월 07일 에서 : 민회빈의 복위 후에 임금이 지은 제문을 내리다
9. 肅宗 44년 윤8월 15일 에서 : 민회빈을 합장할 때 지석과 죽책을 만들지 말고 돌에 새겨 묻게 하다
10. 肅宗 44년 9월 06일 에서 : 민회빈 묘소의 향탄군 5명을 정하고 각기 2명의 보인을 지급하게 하다
11. 肅宗 44년 10월 06일 에서 : 승지 이홍을 보내 친히 지은 제문을 가지고 민회빈의 묘에 치제하게 하다
12. 正祖 02년 4월 22일 에서 : 소현 세자의 민회빈 신주를 세자의 묘 밑에 매안하게 하다

"민회"(愍懷)라는 시호는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위로한다"라는 뜻이다. "민"은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라는 뜻이며 "회"는 "위로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공민왕의 "민"자, 단종의 보호자를 자처하다 수양대군에게 처형당한 혜빈 양씨의 시호인 "민정"(愍貞)에서의 "민", 그리고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무덤인 "회묘"의 "회"에서 보듯 "민"과 "회"는 억울하게,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의 시호에 자주 쓰이는 글자들이다. 억울하게 죽고, 것도 모자라 일가친척과 자식들까지 다 죽임당한 후 시호 받고 묘지 가꿔지면 뭐하나 싶다가도 그래도 조선이 망하기 전에 복권되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민회빈의 억울함과 원통함은 시호를 백번 받고 무덤을 아무리 높여도 풀리지 않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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