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수"는 "신의"와 비슷하게 고려말을 그리고 있는데 공민왕에 대한 관점이 다소 실망스럽다. 물론 이성계의 창업의 주제인지라 공민왕을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의 최후의 군주로 그릴려고 하는거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 속 공민왕은 빼앗긴 땅 수복하고 반원 자주정책을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밀어부친 왕이지 않은가. 드라마 속 공민왕이 정치하는 내용은 원에 치여서 힘이 없다고 한탄하는 장면, 대안으로서 비실질적인 자미원국을 찾겠다고 외치는 것밖에 나온게 없다. 공민왕은 즉위 시점부터에서 적어도 노국공주가 죽기 전까지 국제정세에도 밝고 정치적 감각도 있는 꽤 괜찮은 왕이었는데, "대풍수" 속 공민왕은 이성계에게 나라가 넘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게끔 나약하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보아하니 내일 중으로 흥왕사의 변이 나올 것 같다. 이때 공민왕은 노국공주 덕에 목숨은 건지게 된다. 흥왕사로 들이닥친 자객들이 왕이 숨어있던 방문을 가로막고 있던 노국공주를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실패한 것이다. 이 변이 있고난 뒤 노국공주는 회임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 공주의 죽음, 그리고 정신이 무너지는 공민왕과 신돈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신의"에서 공민왕이 참 인간적이고 정감있게 그려지고 있는지라 "대풍수" 속 공민왕에 비해서는 훨씬 더 정이간다. 이에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공민왕을 연기하는 류덕환씨의 공이 크다. 볼때마다 역사 속 공민왕은 정말 저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섬세하고, 다정하고, 때로는 멜랑콜릭하고, 하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을 겸비한 공민왕. 이 모든 캐릭터가 류덕환의 말투, 표정, 제스쳐에 다 나타난다. "신의"가 끝나더라도 내 머리속 공민왕의 이미지는 류배우가 그린 모습 그대로 남을 것 같다.
P.S. "대풍수"의 공민왕 컨셉이 실망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이를 연기하는 류태준씨는 상당히 맘에 든다. 결정적으로, 류배우님이 눈에 들어온 계기는 노국공주가 영지옹주를 풀어달라며 눈물로 간청할때 너무나도 아련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공주의 눈물을 닦아주던 장면. 그때 그 눈빛과 표정이 어찌나 슬퍼보였는지... 연기 테크닉에 있어서 딱히 본좌급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공민왕을 연기하는 류배우분 특유의 분위기가 아주 독특하면서 매력적이다. 쉬크하면서 로맨티스트이면서 의심병 기질이 어느정도 보이는 공민왕을 다소 "나쁜 남자"스럽게 잘 해석한 듯. 류덕환, 정보석의 기존의 공민왕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자신만의 공민왕 인물화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빠른 시일 내 사극 주연으로 한번 더 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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