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상플) 노국공주가 떠난 후 홀로 남은 공민왕-제2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역사 사랑 2012. 10. 17. 04:33

저번에는 단테의 "신곡" 중 한 글귀를 발견하고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면서 잠든 공민왕의 이야기였다. 오늘편은, 또다른 작품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라는 작품과 공민왕을 연결시켜 보았다. 죽은 부인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과 죽음까지 불사하는 그 사랑은 이들의 공통된 인생사이기도 하다. 오페라든 드라마든 서양이나 동양이나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점 및 그 감성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자,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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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공주의 서고에서 어렴풋이 다가오던 왕비의 얼굴을 보며 잠이들었던 공민왕. 서늘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보름달의 밝은 빛이 반쯤 열린 창문을 넘어, 서고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왕은 정사고 뭐고 다 내려놓고 그저 하루빨리 왕비가 있는 곳으로 가고싶을 뿐이었다. 종친 중에 양자를 들여 왕세자로 세우고, 한 몇년 뒤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죽을때까지 왕비의 명복을 비는 일에만 모든 힘을 쏟고 싶었다. 이 생각을 어머니인 명덕태후에게 넌지시 비추었더니 돌아오는 것은 한나라의 지존이 어찌그리 나약하시냐는 원망과 꾸중 뿐...원나라나 홍건적, 왜구 침입의 문제와 관련해서 대신들의 논쟁과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벅찬데 어머니까지도 왕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이럴 때 왕비가 있었다면...그녀가 있었다면...적어도 따스한 위로 한마디는 들을 수 있었을텐데. 왕의 가슴이 다시 시려왔다.

쓰러져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서고 안을 거닐었다. 간밤에 읽었던 단테의 구절, "비참한 시간에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좋았던 옛시절조차 되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더이상 살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왕비와 함께 했던 예전의 추억과 기억은 왕이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이였다. 

단테의 그 글귀는 왕 자신의 처지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비참하고 허무했던 마음은, 이제 "그 추억조차도 없다면 도대체 어찌 살라고!"라는 분노로 바뀌려고 하였다. 마치 왕의 처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 같았다. 단테의 책을 덮고는 잘 보이지 않는 서고의 윗칸에 꽂아 놓았다.

"내 슬픔과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과연 없단말인가.."

왕은 나지막히 읊조리며 서고의 책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이 책이었지. 벚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던 어느 봄날, 곤성전 뒷뜰에 앉아 같이 읽었던..."

왕은 책의 줄거리를 떠올렸다. 한없이 사랑하던 아내인 에우리디체가 죽어버리자 오르페오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부인과 함께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오르페오는 그의 신비한 악기인 리라 연주와 노래로써 명부의 신인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침내 부인을 찾아오게 된다. 허나, 부인을 데려가는 길에 결코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는 약속에도 불구, 부인이 과연 자기를 따라오는지 궁금했던 오르페오는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 순간 에우리디체는 다시 명부로 끌려가게 된다.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결론나려는 찰나, 그 사랑을 가엽게 여긴 사랑의 신의 도움으로 결국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왕비와 이 책을 읽을때만 해도 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죽은 부인을 못잊어 목숨을 걸고서 명부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를 보고서 왕비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전하, 전하께서 만약 제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부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만약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하기도 싫습니다"
"소설 속의 오르페오처럼, 전하께서는 음악도 잘 다루시고 또 무엇보다 고려 내 최고의 화가이십니다. 전하라면...전하의 음악과 그림으로써 염라대왕을 설득하고도 남을 것 같아서요."
"하하, 부인께선 제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제가 어찌 죽은 자들의 목숨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전하께선 제가 없다면 저를 찾으러 명부까지 오시겠습니까? 오르페우스 이 자처럼 말이지요.."
"글쎄요..저라면...물론 가정이긴 하지만...저라면...흠..."
"뜸 그만 들이시고 어서 말씀을 해주세요, 궁금합니다, 어서요"
"그 전에, 왕비께서 제 곁을 떠날 수 없게 꽁꽁 묶어둬야지요, 그게 안된다면 하늘이든 땅이든 그대를 찾아 어디든 쫓아갈거구요"

왕비는 이 말을 듣고서 싱긋 미소지었다. 그것이 자신의 미래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을 몰랐으리라.

이를 떠올리던 왕의 얼굴에도 서글픈 미소가 지어졌다. 그 때 왕비에게 했던 말들이 다 떠올랐다. 왕비가 너무너무 그립고 보고싶은데, 그 애달픈 마음을 표출할 길이 없어 나날이 가슴 속에 응어리가 생기고 있었다. 에우리디체를 그리며 슬퍼하는 오르페우스의 시를 읽었다. 마치 자신의 심정을 함께 나누는 동병상련처럼 느껴졌다.

"그대는 죽었습니다, 그대는 죽었습니다, 내 사랑하는이여
나는 이리 살아 숨쉬는데 당신은 나를 떠났습니다
나를 영영 떠나버렸습니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셨습니다, 난 여기 있는데-
아니, 아니, 만약 내 노래가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저 깊은 지하 세계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서는 명부의 신의 마음을 녹이겠습니다.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 그대를 되찾을 것입니다.
만약 잔인한 운명이 나에게 이를 허락치 않는다면
그곳에서 그대와 함께하며 죽음을 나누겠습니다.
땅이여 안녕, 하늘 그리고 태양이여 안녕!"


오르페오의 노래는 왕의 노래가 되었다. 지하 세계로 어찌하면 갈 수 있단 말인가...이 왕이라는 자리만 아니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이 나라의 미래 또한 왕으로서 하루아침에 내팽개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세상의 전부였던 부인을 잃은 지아비에게 이 나라가 이제 무슨 소용이 있으리. 왕은 오르페오의 구슬픈 노래 가사만 계속 되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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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베르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중 오르페오의 아리아, "그대는 죽었습니다, 내 사랑하는이여"  


http://www.youtube.com/watch?v=btynSxzbbh8